본문 바로가기

ChemiLOG

K-석유화학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안녕하세요, 한화토탈 블로그 지기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석유화학산업은 전 세계에서 상위권의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기로 유명한데요. 불과 140여 년 전만해도 우리나라는 이러한 산업 발전을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일제의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등 아픈 역사적 사실로 인한 어려운 조건 때문인데요.


오늘은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우뚝 선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의 성장과정, 그 역사 속으로 함께 떠나볼까요?

 

 

01

석유와의 첫 만남 

 

“석유는 영국이나 미국 같은 서양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바닷속에서 난다고도 하고, 혹은 석탄에서 만든다고도 하고, 혹은 돌을 삶아서 그 물을 받은 것이라고 하여 그 설이 다르다…(중략)…우리나라에서는 경진년 이후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그 색깔이 불그스레하고 냄새가 심했으나, 한 홉이면 열흘을 밝힐 수 있었다…(생략)…”
-조선 후기 학자 황현의 「매천야록」 中


조선 말기, 지식인 황현은 「매천야록」을 쓰며 급격하게 변하는 세상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데요. 위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석유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고종 17년, 즉 1880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양 문물에 눈 뜨던 개화기 초, 미국이나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개화파 인사들이 석유와 램프, 성냥을 갖고 귀국하면서 석유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1876년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맺은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의 항구가 열리며 미국과 러시아에서 석유가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유통된 석유는 대부분 등유였는데, 그중 90%는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가 세운 스탠다드오일 회사의 제품이었답니다.

 

 

02

외국계 석유 회사,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상륙

    

1910년, 조선은 경술국치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배를 받게 되는데요. 이때 우리 석유 시장에 미국과 영국의 외국계 석유 회사가 등장했습니다. 그중 한 회사는 서울역 앞에 ‘역전주유소’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1920년대부터 석유는 차량, 선박, 공장 등에서 주 에너지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석유는 전쟁을 치르는데 필요한 군수물자이기도 한데요. 1935년에는 군수물자인 석유를 원활히 공급하고자 했던 일본에 의해 ‘조선석유 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최초의 정유공장이 들어섰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석유 시장은 3개의 영미권 석유 회사와 4개의 일본계 석유 회사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일본계 회사들은 힘을 몰아주고자 조선석유 주식회사에 영업권을 넘기고 철수했습니다.

 

 

03

광복 후 다시 돌아온 외국계 석유 회사

   

광복을 맞이한 대한민국, 하지만 광복은 곧바로 자립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공식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38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소련군, 남쪽은 미군이 정부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이 기간에 우리나라는 석유 공급을 미국과 UN의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미 군정이 종료되고 이듬해인 1949년에는 석유 배급과 관련된 필요한 조치를 구체화하는 ‘한미 석유협정’이 체결되었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며 한반도를 떠났던 영국, 미국의 외국계 기업들이 이 시기에 다시금 우리나라에 진출했습니다.

 

 

04

한국전쟁의 파고를 넘고 피어난 K-석유화학

   

한편, 우리나라는 석유 자급을 목표로 일본이 만들다 만 울산의 정유 공장을 완공하고자 했는데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며 무산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국계 석유 회사들마저 우리나라에서 다시 철수하고 맙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석유와 멀어지는 듯하였으나, 석유 산업 구축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석유 산업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은 전쟁 후 제1,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며 결실을 이룰 수 있었는데요. 특히 1964년 울산 정유 공장이 가동되며 석유화학 산업의 기초재료인 나프타를 직접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섬유와 신발, 플라스틱 등 나프타를 이용하는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고자 했던 우리나라의 상황과 맞물리며. 울산 석유화학단지 건설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생산량을 더 늘리기 위해 여수 단지가 조성되고 추가적인 설비 증설과 투자, 신규 기업의 진입이 활발히 이루어지며 석유화학산업 도약의 발판이 마련됐습니다.

 

05

수출 전진기지, 대산 석유화학단지의 탄생과 현재

   

국가주도로 발전하던 석유화학 산업은, 이후 민간 투자 자율화 되고 기업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한 단계 더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1991년 조성된 대산 석유화학단지는 원료와 제품 생산을 분리해서 운영하던 울산·여수 단지와 달리 대산 단지는 일괄 생산 체제를 갖추도록 기획됐는데요. 중국 수출에 유리한 지리적 이점까지 더해져, 대산 단지는 국내 석유화학의 주요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랐습니다. 이후 석유화학 업계는 성장을 거듭해 1996년 기준 국내 에틸렌 생산 능력 434만 톤 늘었고 본격적인 수출 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 규모는 에틸렌 생간 900만 톤 이상으로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초기 산업을 선도하던 국가들이 놀랄 만큼 빠르고 거대한 성장을 이룬 것이죠. 그 위상은 한류를 비롯한 우리 문화의 전 세계적인 열풍만큼이나 뛰어난 성과입니다!

 


오늘 함께 알아본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의 역사, 재밌으셨나요? 조선 말 처음 한반도에 도착한 석유는 140여 년의 세월을 거쳐 우리 생활을 바꿔놓았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큰 역사적 사건을 넘어 성장한 K-석유화학은 K-POP만큼이나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데요. 앞으로 펼쳐질 혁신적 변화와 치열한 시장경쟁 속에서, K-석유화학이 만들어갈 무궁무진한 미래를 기대해주세요!

※ 참고자료 : 한국석유화학협회 『석유화학으로 만드는 세상』


  

종합 케미칼 & 에너지 리더,

한화토탈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