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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화학] 나일론의 탄생

[월간 화학] 나일론의 탄생

진정일 (고려대 명예교수, 전 IUPAC 회장)

✒️’월간 화학’은 과학자가 들려주는 화학 이야기로 외부 필진의 화학 칼럼을 전해드리는 코너입니다.

지금으로부터 84년 전인 1938년 10월 27일,  뉴욕시 세계 박람회 현장에서 미국 듀퐁사(E. I. du Pont de Nemours & Co.)의 부사장이었던 스타인(Charles M. Stine) 박사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진입’(Entering the World of Tomorrow)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그는 인류 섬유역사의 큰 획을 긋는 커다란 발명을 세상에 선언하였는데 이름하여 ‘나일론’이라는 최초의 합성섬유 판매를 발표한 것이다. 오늘은 특히나 뭇 여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나일론의 위대한 탄생에 대해 들려주고자 한다. 

 

01

석탄, 물, 공기로 만든 인공섬유의 탄생

  

(이미지 출처: 구글 아트 앤 컬쳐)

 

1938년 세계박람회 현장에서 열린 제8차 뉴욕 헤럴드 트리뷴 포럼에서 듀퐁사는 나일론(Nylon)이라는 이름을 붙인 새로운 합성실 제조와 판매를 세계에 처음으로 선언했다.


   「완전히 무기물 세계에서 얻은 재료만으로 제조한 첫번째 합성 유기 직물 천…나일론으로 만든 섬유를 뜻합니다. 
석탄, 물과 공기처럼 흔한 원료로부터 얻었지만, 나일론은 강철처럼 강하고 거미줄처럼 가늘며, 

일반 천연 섬유들보다 더 큰 탄성과 광택을 보이는 가는 실로 직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포럼에 참여하고 있던 3000명이 넘는 여성 클럽 회원들은 미국 뉴욕시 퀸즈의 한 대강당에서 「강철처럼 강한」이라는 가슴을 울리는 표현에 큰 박수 갈채를 보냈다. 일반인들이 나일론 제조에 어떤 화학적 지식과 기술이 필요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석탄, 물, 공기로부터 나일론 섬유를 만들었다는 얘기는 매우 신기하게 들렸다. 


듀퐁사는 스타인 박사의 발표 1년 후 듀퐁사가 있던 델라웨어 주 윌밍턴에서 첫 나일론 스타킹의 시판을 시도했다. 광고문은 짤막했다.


「윌밍턴 여성분들은 여러분 모두가 그동안 얘기해 온 스타킹을 점검하고 구매하도록 추천합니다.」 


듀퐁사는 생산 공장이 아닌 실험국(Experimental Station)에서 원료 섬유를 생산한 후 비밀리에 스타킹 제조업자들이 직조한 4000켤레의 스타킹을 제조했다. 구매를 원하는 사람들은 주소를 확인해 최대 3켤레까지만 살 수 있었다. 4000켤레를 판매하는 데는 3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수천명의 부유한 여성들이 세계 각국에서 미국으로 몰려와 월밍턴 내 호텔에 투숙하면서 지역 내 주소를 얻으려 노력하는 희극같은 일도 벌어졌다.


뉴욕 퀸즈에서 개최된 뉴욕 세계 박람회장의 듀퐁 전시관은 ‘신비한 나일론 섬유의 발명’ 소문 때문에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볐다. 특히 세계 여성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02

‘나일론’에 담긴 비하인드 스토리와 활용 역사

  

(이미지 출처: 구글 아트 앤 컬쳐)

 

나일론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탄생했는지에는 꽤 복잡한 뒷얘기가 숨어있다. 초기에 여러 설명과 함께 제안된 이름만 해도 400여가지에 이르렀다. 사장까지도 제안을 했다. 새롭다(new)는 의미의 ‘누(nu)’가 포함되면서도 소비자들에게 익숙한 레이온(rayon)의 이름을 따 ‘누레이(nuray)’라는 이름을 끌어냈다. 

그러나 새로운 섬유를 오래된 레이온과 유사하다는 인상을 줄 수는 없다는 주장으로 이 이름은 곧 제외되었다. 오랜 토론이 계속 되었고, 매번 이름이 바뀌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 나일론이라는 이름이 최종으로 결정되었다.

 

nuray→norun→nuron→nulon→newlon→nilon→nylon

 

나일론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을 때 일본에서는 다른 방향으로 무역전쟁과 큰 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세계의 스타킹 시장은 일본산 실크(견사)가 점령하고 있었다. 일본이 실크 무역으로 전쟁자금 마련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때에, 나일론 스타킹 열풍은 일본에 어마어마한 물폭탄과 같은 충격이었다.

나일론 스타킹은 실크 스타킹에 비해 탄력도 우수하고, 세탁도 훨씬 쉬워 여성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1939년 첫 18개월간 미국을 상대로한 일본 수출액(약 1억 5000만 달러)의 약 65%가 실크 수출액이었으니, 일본이 경험했을 충격은 짐작할 만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만주 침략에 이어 중국 남경까지 침략한 일본에 대한 미국인의 분노가 일본 제품의 불매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한편 일본 농림성(農林省, Norin성)은 나일론이라는 이름에 발칵 뒤집혔다. Nylon이라는 이름을 반대로 읽으면 일본의 농림성 발음과 유사하며, 일본인들을 경멸하는 표현을 내포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Now You Lousy Old Nipponese!’라는 문장의 단어 첫 자들을 합치면 나일론이 되며, 듀퐁사 사장이 이 이름을 직접 택했다는 것이었다. 듀퐁사가 그렇지 않다며 나일론이라는 이름을 작명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며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이렇듯 나일론 스타킹의 출현은 실크 스타킹을 사양길로 사라지게 했으며, 칫솔의 솔, 나일론 줄(rope), 나일론 플라스틱 등 다양한 제품으로 재탄생했다. 나일론 스타킹의 인기는 나날이 커져 1940년 5월에는 미국 전역에서 나일론 스타킹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42년 2월 11일에 갑자기 나일론 스타킹이 시장에서 사라졌다. 듀퐁사가 나일론의 전 생산량을 낙하산 등 군용만으로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듀퐁사는 나일론을 다시 일반 소비자를 위해 생산하였다. 이후 듀퐁사는 대크론(Dacron), 올론(Orlon), 리크라(Lycra) 등 합성섬유로 폴리에스터(1946), 아크릴(1955), 스판덱스(1958)등을 등장시켰다.

1950년대까지 개발된 여러 가지 합성 섬유들은 소비자들의 다양한 유행 복식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켜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나일론이 1950년대에 수입되기 시작해 모든 여성들이 원하는 새로운 섬유가 되었다. 

 

 

03

천재 과학자 + 대폭 지원 = 역사적 발견  

   

(이미지 출처: 구글 아트 앤 컬쳐)

 

나일론의 발명은 듀퐁사의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파격적 지원과 당대 최고의 천재 과학자 캐러더스의 합작 결과였다. 듀퐁사는 1927년에 유기 화학 분야의 기초연구를 위하여 윌밍턴 연구국(Experimental Station)에 ‘순수과학’ 연구동을 짓기로 하고 스타인 박사의 화학부가 전적으로 이끌도록 했다. 건물이 완공 되기도 전에 ‘Purity Hall’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고, 스타인 박사는 그 공간을 채울 유능한 화학자들 사냥(?)에 나섰다. 그는 ‘능력이 증명되었으며 자기분야에서 인정받는 과학자’를 찾아 나섰다.


일리노이 대학의 로저 아담스(Roger Adams, 당시 가장 유명했던 유기 화학자)와 오하이오 주립대의 헨리 길만(Henry Gilman) 교수들이 스타인의 제안을 거절하자, 스타인은 과학적 진실 추구와 이익 추구 사이의 간격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유치할 과학자의 기준을 낮추기로 하고, 아담스 교수가 추천한 캐러더스를 채용하기로 하였다. 


당시 하버드 대학 화학과 강사였던 캐러더스는 듀퐁의 제안을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마침내 직장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듀퐁사는 하버드 월급($267)의 거의 배가 되는 $500 월급을 제안했으며, 단지 ‘새로운 유기 고분자 합성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 내에서 재량껏 연구해도 좋다는 조건만을 걸었다.


캐러더스는 1928년 2월부터 연구국에 근무하기 시작했으며, 2년 후 1930년 4월에 네오프렌(Neoprene) 합성고무의 합성에 성공했다. 함께 일하고 있던 콜린스(Arnold M. Collins) 박사가 클로로프렌 액체로부터 고분자인 네오프렌을 합성하였다. 같은 해에 캐러더스 팀의 다른 연구원인 힐(Julian W. Hill) 박사는 분자량이 12,000이나 되는 폴리에스테르를 합성하는 개가를 올렸다.
당시만 해도 독일의 슈타우딩거(Hermann Staudinger, 1881~1965, 1953 노벨 화학상)가 주장한 축합반응에 의한 고분자 합성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려는 노력들이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이 폴리에스테르로부터 안정된 합성섬유를 개발하지 못하게 되자 캐러더스는 수년간 고분자에 관한 연구를 중지했다.

 

 

04

탄소가 6개인 두 물질의 합성으로 나일론6,6 탄생

   

(이미지 출처: 구글 아트 앤 컬쳐)

 

그러는 사이 캐러더스의 새로운 상관으로 온 볼튼(Elmer K. Bolton)은 기초연구의 활용성을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캐러더스는 합성 섬유 연구에 다시 집중했고, 글리콜 대신 디아민을 사용해 폴리에스테르 대신 폴리아미드를 합성했다. 이 전략의 변화가 나일론 탄생의 길을 열었다.


특히 아디프산과 헥사메틸렌디아민으로 만든 나일론 6,6(아디프산과 헥사메틸렌디아민 분자에 탄소가 6개씩 들어있다!)의 상품화에 성공하였다. 1935년 2월에 버쳇(Gerhard Berchet)은 캐러더스의 지시 하에 고분자량 나일론6,6을 0.5온스*(oz)나 합성하는데 성공했다.
*온스(oz): 1oz는 약 28.35g으로 0.5oz는 14.17g에 해당하는 양


두 출발물질은 석탄 타르에서 얻은 벤젠으로부터 합성했다. 필요한 암모니아는 공기 중의 질소로부터 만들었다. 즉 나일론은 석탄과 공기로부터 만든 셈이었다.

 

폴리아미드에 존재하는 아미드기(좌측 이미지)는 분자 간 강한 수소결합을 가능케 하여 센 분자 간 인력을 가능케 해 고분자의 결정성과 강직성을 증가시켜준다. 한편 영국의 ICI사는 카프로락탐으로부터 나일론6를 제조·판매하였다. 후에 우리나라에서도 주로 나일론6를 제조하였다. 나일론 섬유는 흔히 거미줄보다 더 가늘지만 강철보다 더 강하다고 설명한다.

캐러더스는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보여 대학(미주리의 타키오 대학)시절에는 상급학생 시절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도 했을 정도였다. 그 후 일리노이 대학에서 석사(지도 교수: Carl Marvel), 박사(지도 교수: Roger Adam)를 받았으며, 몇 대학에서 가르친 후 하버드 화학과(1926)에 정착했다.


캐러더스의 최후는 너무 비극적이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1937년 4월 28일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방에서 음독자살을 했다. 그는 겨우 41살이었다. 그는 하나 밖에 없었던 딸의 탄생을 보지도 못했고, 자신의 발명품이 제품화, 시판되는 현장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합성고분자 역사에 획을 긋는 업적을 남겼다.

 


  

종합 케미칼 & 에너지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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